Issue 46

June, 2025

기고

두번의 남극의사 파견

  • 작성자

    정진호
  • Issue 46

    2025-06
  • 소속

    국립중앙의료원 외과

 저는 현재 국립중앙의료원 서울권역외상센터에서 근무중인 외과 전문의 정진호입니다. 의사로써 살아오면서 남극에 파견 갈 기회가 두번이나 있었고 남극에서 의사로 일해본 경험은 제 진로와 현재 하고 있는 일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소개해 보고자 합니다.


 첫 경험은 2012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남극 킹조지섬에 대한민국의 첫 남극기지인 세종과학기지가 있습니다. 현재는 기지의사를 봉직의로 선발하고 있으나 2012년 당시에는 공중보건의 중에 공채를 통하여 선발하였습니다. 저도 당시에 의대를 갓 졸업한 일반의로 바로 공중보건의를 지원하였고 세종과학기지 26차 월동연구대 의사로 선발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의사생활의 처음을 남극에서 시작했다 할 수 있겠습니다. 당시 2012년 11월말에 남극에 들어가 2013년 12월말에 귀국했으니 1년이 조금 넘게 체류하였습니다.


 남극으로 들어가는 길도 만만치 않습니다. 한국에서 출발해서 프랑스 파리와 칠레 산티아고를 경유하여 관문도시인 남미의 땅끝 칠레 푼타 아레나스에 도착하는데도 2박3일이 걸립니다. 거기서 또 기상악화로 5일정도 대기를 하고 나서야 남극으로 들어가는 비행기를 탈수 있었습니다. 고생 끝에 남극에 첫 발을 딛었을 때 본 - 말 그대로 온세상이 새하얀 - 설산과 설원의 풍경은 지금까지도 가장 인상적인 순간으로 남아 있습니다.


 남극에서의 1년은, 물론 세상과 단절되어 있다는 외로운 기분이 가끔씩 들기는 했지만, 심심하거나 지겨웠던 기억은 없습니다. 기지밖으로 나가면 다른 어느 곳에도 없는 거친 남극의 풍경들과 펭귄, 해표, 물개들을 언제나 볼 수 있었습니다. 환자가 없을 때는 쾌적한 기지에서 독서하고 영화보고 운동하면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또한 각자 자기 분야에서 선발되어 온 다양한 직군의, 다양한 연령의 대원들과 함께 생활하고 어울렸으며 타국가 기지에 방문하여 외국 대원들과 교류하는 것도 신선한 경험이었습니다.


 어느 주말에 기지 근처에 봉우리로 대원 몇 명과 등산을 했습니다. 정상이 그리 높지는 않았는데 세종기지가 위치한 곳이 섬이라 그런지 정상에 오르니 아주 먼 풍경까지 볼 수가 있었고 저 멀리 남극대륙의 반도 일부가 보였습니다. 그 풍경을 보고 나니 여기까지 와서 섬에만 있고 남극 대륙을 밝아보지 못하는 것이 너무 아쉬워서 그날 돌아와서 남극 대륙을 방문할 수 있는 여행상품이 있나 검색까지 해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의사로서는, 파견 전 기본적인 의무교육을 받기는 했지만 임상경험이 적은 일반의 였기 때문에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대원들이 부상정도가 심한 경우에는 주변 외국 기지에 파견된 전문의들에게 도움을 받았고 특히 많은 도움을 준 러시아의 신경외과 선생님과는 감사한 마음에 아직까지도 연락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남극 파견의사로서 1년의 경험은 자신감보다는 미숙함을 많이 느끼게 해주었고 이는 귀국 후 공중보건의 생활을 마친 후의 진로 결정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수술도 할 수 있으며 입원환자 관리도 익숙하게 해야 하는, 단 한 명의 의사 로서도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는 외과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외과 수련생활 중에도 자주 남극소식을 찾아보았습니다. 그 사이 남극 대륙의 해안가인 테라노바 베이에 대한민국의 연구기지인 장보고 과학기지가 건설되었으며 남극 대륙 깊은 곳에서의 연구를 위해 남극 내륙으로 들어가는 K루트 탐사대가 활동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지인 의사들 중에 남극 대륙으로 파견을 가시는 분도 있어 많이 부러워했던 기억이 납니다.


 시간이 흘러 외과 전문의가 된 후, 외상센터에서 근무하고 있던 2022년, 10년만에 다시 남극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남극 내륙연구를 진행하고 있던 K루트 탐사대에서 2022년에 네번째 내륙탐사에 참여할 의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남극 기지와는 달리 K루트는 처음으로 독자적으로 남극 내륙 깊은 곳으로 진출하는 프로젝트인 만큼 외상 환자에 대한 경험이 많은 의사가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4년전 첫번째 탐사에는 고려대학교 구로병원 응급중환자외상외과 김남렬 교수님이 다녀오셨습니다.


 가족들과 동료들과 교수님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또 한번 남극행을 결정하였습니다. 10년 동안 저도 여러 건의 수술경험과 중환자, 외상환자 경험을 해보았으므로 자신이 좀 생겼습니다. K루트는 세종기지와는 전혀 다른 방향에 있는 장보고기지에서 출발하므로 이번에는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서 남극대륙으로 들어가는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이번에는 섬이 아닌 남극대륙으로, 공중보건의가 아닌 외상 전문의로 10년만에 다시 남극 땅을 밟았습니다.


 이번 임무는 기간이 3개월 남짓으로 길지는 않았지만 기지 상주가 아닌 연구차량 내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남극 내륙의 빙원으로 올라가 탐사하는 것이어서 예전에 비해 환경이 더 거칠고 살벌했습니다. 심한 눈보라인 블리자드가 불 때는 잠깐 밖에 나가 서있기도 힘들 정도였고 중간중간에 빙하사이의 큰 구멍인 크레바스에 빠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위험지역에서는 안전대원들이 선봉에 서서 신중하게 진행하였습니다. 의료환경도 기지보다 더 열악했으며 가지고 갈수 있는 짐의 부피도 한정되어 있었으므로 필요한 의약품, 장비를 신중하게 골라야 했습니다. 워낙 추운 환경에 노출이 잦아 휴대용 초음파나 휴대용 엑스레이 등의 전자제품들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생겼으므로 꼼꼼하게 점검을 해야 했습니다.


 다행히 이번에 탐사를 함께한 8명의 대원들은 모두 남극 파견 경험이 많은 베테랑들이라 차분하고 신중하였으며 여러모로 저를 많이 도와주었기 때문에 큰 사고나 부상 없이 임무를 마무리 할 수 있었습니다. 샤워와 식수에 쓰기위해 대원들과 밖에서 눈을 삽으로 퍼 오기도 하고 냉동 식재료를 조합해서 같이 식사를 준비하고 기상이 악화되었을 때에는 차량에 갇혀서 얼어버린 맥주를 녹여 먹으면서 이야기 꽃을 피우는 등, 캠핑을 하는 것 같은 소소한 재미도 있었습니다.


 남극대륙을 방문한 덕분에 10년 전에는 보지 못했던 그 유명한 황제펭귄 무리들도 볼 수 있었습니다. 황제펭귄 새끼들은 냄새는 많이 났지만 다큐멘터리에서 본 것보다 훨씬 귀여웠습니다. 또한 장보고 기지로 향하는 길에 남극에서 가장 큰 기지인 미국 맥머도 기지를 경유하면서 방문해 본 것도 저에게는 행운이었습니다. 상주인원이 1000명이 넘는 남극에 가장 큰 기지인 만큼 조그만 도시를 방불케 하는 거대한 전경이 장관이었습니다.


 가족들과 동료들의 희생(?) 덕분에 남극 대륙을 가보고 싶다는 숙원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입니다. 귀국 후에도 남극을 두 번 방문해본 경험을 토대로 현재 근무하고 있는 국립중앙의료원 외상센터에서 남극기지의 의료를 지원하는 일에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남극에 파견되는 의사 교육과 정기적인 화상회의를 통해 남극 의료상황을 점검하고 있습니다.


 남극에 파견되는 인원은 사전 건강검진을 통한 스크리닝을 하므로 대부분은 건강에 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남극 현장에서 심각한 중환자가 발생하는 빈도는 적습니다. 다만 춥고 척박한 환경에서 탐사나 연구를 진행하며 여러 중장비들이 운용되다 보니 외상이 발생할 위험성은 항상 존재합니다.


 중환자를 보는 의사들은 환자들을 직접 진료하는 것 이외에도 기본적으로 중환자실의 관리를 맡고 있습니다. 함께 근무하는 의료인들의 역량과 운용가능한 장비가 무엇인지, 어떤 것이 가능하고 어떤 것이 불가능한지 항상 생각하고 계실 것입니다. 이런 경험이 남극에서의 진료에 큰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지나 탐사대의 의료환경을 미리 파악하고 점검해서 환자 발생시에 현장에서 꼭 해야 하는 처치와 불가능한 처치를 빠르게 판단하고 필요시 이송을 결정하는 과정이 중요하기 때문에, 중환자 의사들이 활약할 수 있는 환경입니다.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임상현장에서 한발짝 나와서 이세상 것이 아닌 것 같은 환경을 경험해보는 것이 개인적으로도, 의사 인생에도 많은 영향과 영감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에 뜻이 있는 선생님들에게 남극 지원을 적극 추천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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