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번아웃이다

당신은 번아웃이다

  • 작성자

    이산
  • Issue 39

    2023-06
  • 소속

    연세의대 용인세브란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임상조교수
1. 번아웃(Burnout)

소진이라고도 칭하는 번아웃은 1974년 미국의 정신분석가인 Herbert Freudenberger에 의해 처음으로 그 용어가 사용된 후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다루어져 왔으며, 사회심리학자 Christina Maslach은 번아웃을 측정할 수 있는 도구로 Maslach Burnout Inventory (MBI)를 고안했다. MBI에서는 정서적 탈진, 냉소 혹은 몰개성화(정체성의 상실), 그리고 개인적 성취감의 상실이라는 세 요인으로 번아웃이 구성된다고 보았는데, MBI 도구 중 대표적인 MBI-GS (MBI-General Survey)의 한국판 설문척도를 먼저 소개한다.


전혀
그렇지
않다
보통
이다
매우
그렇다
1. 내가 맡은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정서적으로 지쳐 있음을 느낀다.
2. 직장일을 마치고 퇴근시에 완전히 지쳐있음을 느낀다.
3.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할 생각만 하면 피곤함을 느낀다.
4. 하루종일 일하는 것이 나를 긴장시킨다.
5. 내가 맡은 일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완전히 지쳐있다.
6. 현재 맡은 일을 시작한 이후로 직무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다.
7. 내가 맡은 일을 하는데 있어서 소극적이다.
8. 나의 직무의 기여도에 대해서 더욱 냉소적으로 되었다.
9. 나의 직무의 중요성이 의심스럽다.
*10. 나는 직무상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11. 내가 현재 소속된 직장에 효과적인 기여를 하고 있다고 느낀다.
*12. 내가 생각할 때, 나는 일을 잘한다.
*13. 나는 직무상에서 무언가를 성취했을 때 기쁨을 느낀다.
*14. 나는 현재의 직무에서 가치 있는 많은 일들을 이루어왔다.
*15. 직무상에서, 나는 일들을 효과적으로 처리하고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각 문항당 0에서 6점까지로 응답하여, 총점은 0점에서 90점 구간이 가능하다. 긍정 문항인 10번부터 15번까지의 역배점에 유의하여 문항당 합산 점수로 자신의 번아웃 수준을 가늠해볼 수 있는데, 번아웃을 선별하기 위한 구체적 절단점(cutoff)은 아직 제시된 바 없으나, 병원종사자를 대상으로 진행된 선행연구를 참고하였을 때, 대략적으로 총점 53점은 상위 16%, 59점은 상위 7%, 65점은 상위 2.5% 수준의 번아웃으로 가늠해볼 수 있다. 만약 MBS-GS 척도에서 이에 해당하는 높은 점수를 기록했거나, 각 문항이 마치 자신의 이야기인 것처럼 느껴진다면, 이는 당신이 이미 잠재적으로 번아웃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시사하며, 이어서 소개할 3가지 번아웃 신호에 대해 스스로 점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2. 번아웃의 3가지 신호

하나, 정서적으로 탈진되어 있다면. 끊임없이 이어지는 환자 진료와 병원 행정 업무를 어떻게든 해결해가고는 있지만, 그 과정에서 만성적으로 피로가 쌓이고 쉬이 피로가 풀리지 않는다면 이는 번아웃 신호일 수 있다. 주말에 쉬어야겠다 생각하며 휴식을 미루어 놓지만, 정작 주말이 되어 그간 부족했던 잠을 아무리 몰아서 자더라도 피곤은 풀리지 않고 에너지가 없는 느낌이 든다면, 무언가를 새로 실행하고 추진할 여력이 부족하고 다가올 평일이 무거운 돌덩이처럼 먹먹한 부담으로만 느껴진다면 당신은 번아웃이다.


둘, 냉소로 가득차 있다면. 세상 어떤 상황과 주제도 온전히 긍정적인 부분만 있거나, 반대로 순전히 부정적인 부분으로만 채워지지는 않는다. 즉, 상황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그 해석과 적용이 달라질 수 있는데, 만약 당신에게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는 관점이 사라져가고, 스스로가 처한 현재의 상황은 물론이거니와 앞으로 예측되는 상황도 부정적으로 암울하게 채색되고, 냉소적으로만 평가하게 된다면, 이 또한 번아웃 신호일 수 있다. 환자 진료에 대해, 기타 과중한 업무에 대해, 평소 교류하게 되는 대인관계와 주변 평가에 대해 차디찬 냉소와 허무주의로 반응하고 있는 자신을 문득 발견하게 된다면 당신은 번아웃이다.


셋, 일하는 보람과 성취를 느끼지 못한다면. 의업에 종사한다는 숭고한 마음으로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고, 고된 수련 기간을 거치면서 지금에 이르렀지만, 결연한 첫 마음은 어느새 사라지고 내가 하고 있는 일의 가치를 찾기 어렵고 공허한 마음만 메아리친다면 이는 번아웃이 보내는 신호일 수 있다. 생사를 오가는 환자 치료에 전념하며 정신없이 이어지는 병원의 일상을 해치워가는 도중 문득 ‘내가 무얼 위해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가’ 반문하게 된다면, 그리고 그 질문이 전에 비해 자주, 그리고 오래 떠오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당신은 번아웃이다.


3. 무엇이 번아웃을 만드는가

현대 사회는 풍요와 과잉으로 규정할 수 있는 시대이며, 풍요와 과잉의 반작용으로 나타나는 대표적인 시대적 증상이 번아웃이다. 재독철학자 한병철은 저서 ‘피로사회’에서 이전 시대의 특징인 규율사회에서 21세기에 이르러 성과사회로 변모했다고 말한다. 무한정한 ‘할 수 있음’이 성과사회를 대표하는 긍정적 조동사이며, 그 긍정성의 과잉에 부응하여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에 부응하려 애쓰다가 지쳐버려, 그 결과로 소진, 즉 번아웃이 발생한다고 말한다. 21세기의 개인은 더 이상 복종적 주체가 아닌 성과주체이며, 성과주체인 자신이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기게 되고, 이로부터 발생하는 모순적, 능동적 과다 노동과 성과제일주의로 인해 자기착취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번아웃의 종말’의 저자 Jonathan Malesic도 비슷한 논조로 제시한다. “우리는 번아웃을 겪기 싫다고 말하지만 우리의 번아웃을 유발하는 일을 둘러싸고 여태까지 구축해온 의미 체계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결과로 드러나는 현상인 번아웃은 피하고 싶지만, 번아웃을 유발하는 원인을 변화시키고 싶지 않으며, 그래서 변화를 만들 수 있도록 대안을 모색하는 시도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지금 내가 처한 환경이 얼마나 과중한지를 인식하고 이에 문제 제기를 하기는커녕, 수정이나 변화 없이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나의 과업이자 익숙한 기준점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에 더해 나의 생산성과 나의 가치를 동일시하는 가치체계가 공고하게 자리잡아, 나의 생산성에 부정적 영향을 초래하는 상황은 내 가치를 떨어뜨리는 상황으로 간주되어 쉽사리 이를 받아들일 수 없고, 도리어 더욱 애쓰고 성취하여 성과를 내고 입증하게끔 하는 성과주체의 본능이 작동하고 과열되어 번아웃에 이르는 것이다.


4. 어떻게 번아웃에서 벗어나는가

성과주체의 능동적 자기착취, 그리고 나의 생산성과 나의 가치를 동일시하는 가치체계에 기인한 번아웃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음의 4단계를 제안하고자 한다. 이 4단계는 스스로 관찰하기, 한계를 인정하기, 한계를 설정하기, 게으름을 실행하기로, 이 과정을 ‘한계를 바로 세우기’라고도 할 수 있겠다.


시작은 스스로를 관찰하는 것이다. 본인의 생활 패턴, 일의 특성과 분량, 배분할 수 있는 에너지와 자원 수준을 점검하는 과정으로, 스스로 번아웃 신호를 이미 느끼고 있다면, 성과주체로서의 본능이 과부하 상태를 정상적 기준점으로 받아들이고, 지속 가능하지 않은 상태를 지속할 수 있는 상태로 오인하게 하며 유지해왔다는 것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은 한계를 인정하는 단계로, ‘불가능이란 없다’는 긍정 과잉의 메시지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한계 인정이 스스로의 평가 절하가 아님을 자각하는 과정이다. 만성 피로와 탈진, 냉소의 신호가 있다면 이는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점에 다다르고 있거나, 이미 그 지점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리는 경고 신호이다. 허기를 느끼면 먹어야 하고, 피곤을 느끼면 쉬어야 한다. 피곤함은 도리어 정상적이고 효과적인 보호 작용이다.


누구에게나 한계가 있을 수 있으며, 스스로에게도 그 한계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구체적 한계 수준을 설정하는 단계로 이어져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설정하고, 해야 하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을 구분해야 한다. 한계를 설정한다는 것은 ‘잘 포기하는 법’을 배우고 적용하는 과정이자, 나의 생산성과 나의 가치를 동일시하는 사고에서 벗어나는 실천적 선언이다. 구조적 문제이자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 문제라 탓하고 체념하기 전에, 스스로 조정할 수 있는 부분을 탐색하고 수정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어서 마지막 단계는 게으름을 실천하는 단계로, ‘새로 고침 버튼’인 건강한 게으름을 경험하는 것이다. 무의식적, 관성적으로 행하던 수많은 멀티태스킹에서 벗어나,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나를 경험해가는 과정이다. 과거의 잘못을 후회하고 미래의 일정을 계획하는 데에만 몰두하던 모습에서 벗어나, 단순하고 게으르게 지금 이 순간 자체에 몰두하고 음미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다. 위축되고 소멸되어 가는 ‘지금, 여기’의 나를 발견하고, 과거와 미래에 사로잡혀 있는 나를 회복하는 이 과정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경험일 것이다.


‘한계를 바로 세우기’ 단계를 통해 성과주체로서의 본능에서 벗어나고, 생산성에 몰두하고 이에 절대적 가치와 자기 정체성을 부여하던 현상에서도 벗어나보자. 비록 지금의 내가 그다지 달라지지 않고 일상에서 그다지 생산적 가치를 만들지 못한다 느껴지더라도 괜찮다. 지금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그 순간을 음미하는 경험을 해보자. 여백을 만들고, 건강한 게으름을 경험해보자. 이를 결심하고 실천으로 옮긴다면 조금씩 번아웃의 3가지 신호에서 멀어질 수 있을 것이며, 일상의 건강한 방향과 새로운 의미도 발견해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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