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연수기

미국 연수기 - 대혼란 미국 정착부터 일상의 소중함을 지나 현재까지

  • 작성자

    이연주
  • Issue 38

    2023-06
  • 소속

    분당서울대학교병원 호흡기내과
1. 대혼란의 시기 “미국 정착”

연수 오기 전 가장 고민하고 도무지 감을 잡지 못했던 것이 바로 미국에 처음 도착해서 어떻게 정착을 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J1, J2, ds-2019, SSN, DMV 등 도움을 주려는 선배들이 여러 가지를 미리 말씀해 주셨는데 미리 알아본 게 없는 나에게는 그저 잘 모르는 암호로 다가올 뿐이었다. 연수과정에 대해 예습을 미리 못한 나는 거의 한국을 떠날 때 되어서야 저런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다. 혹시나 이 글을 읽는 연수를 앞둔 분들이 계시다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기본적인 내용은 꼭 알고 연수준비를 하자는 의미에서) 초반 정착 과정을 간단히 이야기하고 싶다.

J1은 방문연수를 오게 되는 당사자의 비자이고, J2는 그 사람을 따라서 함께 오는 가족들에게 주어지는 비자인데, J1 VISA를 받기 위해서는 연수지 병원 혹은 학교에서 나를 받아주는 교수(PI)의 서명이 담긴 DS-2019 원본 서류를 한국으로 우편을 통해 미리 보내주어야 한다. 이 DS-2019 서류를 받으면 한국에 있는 미국 대사관에 이 서류를 제출하면서 미국비자를 신청하는 과정을 진행할 수 있다. 따라서 비자 신청을 하고 대기 시간을 감안한다면, DS-2019 서류는 가급적이면 일찍 받는 게 좋고, 적어도 출국 3달 전에는 받아야 여유롭게 미국 비자를 신청해서 받을 수 있다. (DS-2019를 미국에서 받은 이후 미국 대사관에 비자를 어떻게 신청하는지 등등의 과정은 우리나라 녹색 검색 엔진에서 검색하면 쉽게 찾을 수 있다.)

2022년 8월, 나는 가족들과 드디어 희망의 땅, 햇살 좋은 캘리포니아에 도착했지만, 엄청난 환율 (1400원대)과 정리되지 않은 불안정함으로 따뜻한 날씨를 만끽할 여유가 없었다. 남편이 일 때문에 함께 있지 못해서 초반 3주 동안 정착을 도와주고 다시 한국에 돌아가야 하는 일정이어서 매일 정착에 필요한 일들을 하러 이곳 저곳 관공서에 쫓아다니는 와중에 아이들은 피곤하다고 힘들어하고… 돈 몇 푼(환율 때문에 막상 몇 푼이 아니었음 주의) 아끼려고 왜 정착도우미 서비스를 받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가구도 없는 빈 집에 찬 바닥에서 자려니, 내가 왜 타국에서 이 고생을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햇살이 따뜻한 캘리포니아에 살면서 집안은 왜 이렇게 춥나 싶었다. 생각보다 집안이 정말 춥다. (샌프란시스코, 멘로파크 쪽으로 연수 오실 분들 여름 옷만 가져오시면 정말 경기도 오산).

미국에 와서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전화기를 개통하고, 은행 예약을 잡고 방문해서 계좌를 여는 일이다. 그리고 꼭 잊지 말아야 하는 초반 필수 작업은 연수 온 대학교에 visiting scholar들의 비자 서류를 담당하는 Bechtel international center에 내가 미국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리는 일이다. 그리고 학교에 간 김에 대학의 ID 및 병원 출입/ID 카드를 함께 받으면 편리하다. 이 즈음에는 이 학교/병원 ID카드들만 있어도 배가 부른 느낌이었는데, 낯선 곳에서 내 신분을 보장해 주는 공식화된 카드를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은 생각보다 매우 소중한 자산인 것 같다. 아무튼 이런 소소한 행정업무들이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리 어렵지도 않은 일들 같은데, 어딘가 낯선 곳에서 낯선 언어로 새로운 공간의 문지방을 넘어서는 일조차 쉽게 여겨지지 않았다. 한국에서 챙겨온 나의 소중한 개인정보가 담긴 서류들이 담긴 백팩을 거북이 등딱지처럼 매일 메고 다니면서 여기저기 필요한 서류를 제출하고 나의 신분과 거주지를 증명하면, 비로소 미국이라는 나라에 나의 정착이 공식화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시점이 있는데, 바로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은 이후인 것 같다.

운전면허증은 미국에서는 DMV라는 기관에서 담당하고 있는데, 먼저 필기 시험(인터넷으로 가능)을 응시하고, 이를 통과하면 실기 시험을 응시하면 된다. 실기시험은 근처에 있는 DMV에 가서 보면 되는데, 그날의 감독관도 중요한 것 같다. (내 옆에는 굉장히 고압적이고 무서운 사람이 앉아 나를 매우 혼내서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으나, 다행이 한번에 통과했다.) 면허증을 받는 과정도 순탄치는 않았다. 이 곳에서는 담당자가 누구인지에 따라서 대처가 달라지는 희한한 경험을 할 수 있는데, 처음 운전 면허를 받으러 갔을 때, J1 비자 신분은 나에게는 SSN이 없으면 운전면허를 줄 수 없다고 하였다. SSN이 없더라도 운전면허는 받을 수 있다고 한국의 녹색 검색 엔진에서 여러 번 확인을 했는데, DMV의 첫 담당자는 “J1 VISA신분인 사람은 SSN을 받을 수 있으니 그걸 받아와야만 운전면허를 줄 수 있다”면서 내 운전면허 발급을 거절했다. (SSN은 굳이 필요가 없기도 하고, 크게 쓸 일도 없어서 당시에 아직 신청하지 않은 상태였다.) 몇 번 항의를 해봤지만, 요지부동이었고, 나는 매우 좌절했다. 그러나 미국 관공소는 담당자에 따라 워낙 대처가 다르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지라, 당일 오후에 다시 같은 DMV를 방문해서 첫 번째와는 다른 두 번째 담당자를 만났는데,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 운전면허증을 발급해주었다.

아무튼 다행히 남편이 함께 있는 동안 정착에 필요한 모든 일을 마치려고 함께 동분서주한 덕분에, 핸드폰, 인터넷, 은행계좌/신용카드, 자동차 구매/보험가입, 가스연결, 집안 가구, 운전면허까지 초반 2주 안에 필요한 큰 일들은 거의 마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400만원이 넘는 돈을 주고 (당시 환율 고려) 정착도우미 서비스를 받지 않았던 게 다행인 것 같다. 하나하나 알아보면 사실 우리 나라 녹색 검색 엔진에서 왠만한 정보는 거의 다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미국에 심리적 장벽이 높고, 그런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기 어려운 상황에 있는 분은 정착서비스를 받으면 도움이 될 것 같다.

 



2. 일상의 소중함

정착 후에 내 생활의 안정을 찾기 위해서는 새로운 routine이 필요하다. 3주간 정착에 필요한 여러가지 대혼란의 시기를 지나고, 4주차에 접어들면서 집안에 몸을 뉘일 침대와 앉아서 식사를 할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 등의 기본적인 가구가 갖추어지자, 어느새 나도 모르게 만족감이라는 것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는 캘리포니아의 맑은 하늘과 따뜻한 햇살이 느껴지고, 행복과 희망의 시기가 도래한다.

8월 3주차 정도에 아이들 학교도 개학을 하면서 나의 생활도 서서히 루틴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여느 가정주부와 같이 아이들의 도시락을 싸서 학교에 보내고 나면 6시간 정도 나만의 시간이 주어진다. 병원에 가는 날은 병원에 나가고, 그렇지 않은 날에는 운동도 하고, 여러 집안일도 하고, 밀린 논문들도 정리하면서 시간을 보내는데, 이 즈음 아침에 일어나면서, 내가 완전히 이완된 상태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뭔가 단단하게 나를 당겨오던 가느다란 실이 탁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것은 매일 아침 나를 기다리는 중환자실 환자가 없다는 점이었다. 연수 생활에서 정신적으로 가장 나를 자유롭게 만들어준 점인 것 같다. 한국에서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어제 입실한 중환자실 환자가 밤사이 특별한 일은 없었는지,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지는 않았는지 하는 생각에 뭔가 모를 내재된 불안과 긴장감이 항상 있었는데, 이곳에 와서는 그 부분이 완전히 달라졌다. 내 환자가 없으니 아침에 일어나서 해야 하는 고민은 오늘은 도시락을 뭘 싸줘야 할까, 오늘은 아이들에게 뭘 해줘야 할지, 장에 가서 뭘 사야 할지…등의 이런 일상적인 고민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나에게 참으로 생경한 느낌이었고, 뭔가 모를 마음속의 부담감이 사라진 상태는 그 자체로 온전히 나를 편안한 상태로 인도했다. 물론 혼자서 아이들을 돌보고,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오롯이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서 받는 스트레스도 어느정도 있었지만, 생사를 오가는 중환자들을 책임지고 있는 상황에서 오는 스트레스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 동안은 몰랐지만 나는 여태 그러한 정신적인 긴장감을 늘 놓지 못하고 지내왔다는 것을 여기에 와서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여기서의 새로운 루틴은 그야말로 하루하루 여유롭고 가정에 충실한 생활이다. 아침에 일어나 아이들 도시락 싸고, 학교 보내고, 병원에 가서 일을 하다가 (병원에 가지 않는 날은 스탠포드 교정에 있는 짐에 가서 운동도 하고 골프도 배우고, 그동안 미루어 둔 연구나 영어공부 등을 하고, 장보기도 하고) 아이들이 올 시간이 되면 아이들을 픽업해 집에 와서 밥을 해 먹이고, 정리를 하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면 어느 새 잘 시간이 된다. 이러한 새로운 일상의 루틴에 이제는 많이 익숙해졌고, 이런 소소한 일상이 참으로 소중하고 즐겁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이 생활이 1년이라는 기약이 있기 때문에 더 즐겁고 소중하게 느껴진다는 생각이 든다. 돌아갈 곳이 없고, 이 곳에서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한다면 그것은 또다른 스트레스로 다가올 것임을 알고 있다.

 



3. 미국의 자연이야기

스탠포드에 연수 와 있는 한국 교수들의 단톡방이 있는데 거기서 누군가 연수오기 전 “우산이 필요할까요?” 라고 선배에게 물어봤는데, 그 전에 와 계시던 선배분이 “우산 같은 소리하네” 라는 핀잔을 듣고 우산을 챙겨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2022년 겨울부터는 적어도 한 달에 반 이상은 비가 온 것 같고, 글을 쓰고 있는 2023년 3월 오늘도 비가 오고 있다. 심한 폭풍이 예상되어 캘리포니아 주 전체에 폭풍주의보가 내린 때에는 여지없이 정전이 발생했다. 몇 백 년도 넘어 보이는 커다란 나무들이 세찬 바람에 쓰러져서 옆에 전신주를 들이받아 전기가 나가고, 주변에 주차된 차 위로 쓰러진다거나 (실제로 이로 인해 우리 동네에서 사망사고가 있었다) 아이들 학교 교실에 홍수가 나서 거의 4주간 교실이 아닌 강당에서 수업을 진행했던 경험은 그동안 내가 한국에 살면서 한번도 겪어 보지 못한 일이었다. 작년 겨울 심한 폭풍이 왔던 날, 우리집도 정전이 되어 물 외에 온수, 가스, 전기 모두 쓸 수 없는 환경이 되었다. 다행이 24시간 정도 이후에 전기가 돌아오긴 했지만, 이후로도 폭풍주의보와 정전이 2번이나 더 있었다. 그냥 비 내리는 강도로 보면, 우리 나라의 여름 장마철 비가 훨씬 많이 오는 거 같은데 이정도 비에 이렇게 정전이 잦은가 하는 생각도 사실 들었다. 한편, 이곳은 자연을 거의 손대지 않고 그대로 두기 때문에 이렇게 큰 나무가 거리 곳곳에 일상이 되고, 그래서 자연이 몰고 오는 피해에 대해서도 우리보다는 비교적 관대한 마음을 가지고 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자연이 자연을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아주 심하지 않은 피해에 대해서는 크게 중재하지 않고 그저 지켜보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 나라였으면 뭔가 피해를 줄 우려가 있는 나무에 대해서는 조치를 취했을 것 같은데…편리한 것은 당연히 우리나라가 모든 면에서 월등한데, 거리마다 몇 척이 넘는 나무들과 천혜의 자연환경은 이 나라만이 가진 자산이므로 어디가 더 살기 좋은지는 생각하기 나름인 것 같다.


  

(좌. 햇살 좋은 날의 스탠포드 교정) (우. 먹구름이 잔뜩 낀 날의 스탠포드 교정)

 



4. 연수병원

2022년 8월부터 나는 Stanford university of Medicine에 연수를 와 있다. 미국에서 사람들이 거의 유일하게 마스크를 하며 지내는 곳인 것 같다. 나는 마취과 전공의 중환자/신속대응팀 담당 교수에게 연수를 와 있는데, 이분은 중환자실을 중심으로 보면서 1년에 2달 정도는 수술방에 들어가기도 하고, VA Palo Alto와 Stanford Hospital의 중환자실을 모두 rotation하는 일정이었다. 덕분에 두 병원을 모두 가서 함께할 수 있었는데, 환자군과 병원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VA Palo Alto는 노인 남자 환자들이 거의 대부분이었고,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환자들의 중증도가 크게 높지는 않은 편이고 그래서 조금 여유 있는 ICU 환경이었던 반면에, Stanford Hospital의 중환자실은 중증도가 매우 높았다. Stanford Hospital에서 중증치료를 하고, 어느정도 호전상태가 되면서 만성화될 것 같은 환자는 VA Palo Alto로 보내서 그쪽에서 이후의 치료를 하는 경우도 꽤 있었다. Stanford Hospital은 구관과 신관이 있는데, 신관 중환자실의 병실은 모두 1인격리 중환자 병실이면서 한쪽 벽면은 통유리창으로 되어 있었다. 이 곳에 입원하는 중환자들은 모두 햇볕이 잘 드는 통유리창을 가진 1인 격리 병실에 입원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도 구관은 2인 혹은 4인실 중환자병실이 아직 남아 있었다. 1인 격리 병실에 대한 그쪽 사람들의 생각도 역시 우리가 하는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보기에 좋고, 감염 위험이 적은 건 분명하지만, 한 병실의 공간이 작아 ECMO, CRRT, VENT 등의 여러 장비를 중환자 경우에는 장소가 협소하다는 점 그리고 한눈에 환자들이 보이지 않으니 나빠지고 있는 것을 인지하는 게 느려질 수 있다는 점이 불편하다고 하였다.

Stanford Hospital 중환자실을 참관하면서 통창이 있는 1인 격리실 외에는 사실상 우리 병원의 하드웨어와 큰 차이는 느끼지 못했다. 우리가 쓰는 장비들과 거의 동일한 것들이었다. 다만, 교육적인 측면에서는 큰 차이가 있었는데, 인턴과 학생이 중환자실 환자를 직접 담당하는 점이 놀라웠다. 회진 시에 각자 맡은 환자가 있고, 직접 환자에 대해서 브리핑을 하고 보호자 면담을 하고 실제 주치의들이 하는 역할을 그대로 수행하고 있었다. 우리 나라는 여러 우려로 인해 특히 인턴의 역할이 축소되고 있고, 학생은 사실상 거의 참관하는 역할에서 그치는데 반해 이곳에서는 (전임의 백업이 있다 해도) 거의 주치의처럼 일하는 모습을 보고 정말 많이 놀라웠다. 또한 그들이 브리핑하는 실력 역시 전공의 못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한 학생의 역할이 아주 인상깊었었는데, 중환자실 보호자의 면담을 본인이 도맡아서 하고, 보호자 역시 이 학생에게 아주 의지를 하고 있었는데, 우리 나라 중환자실에서는 한번도 보지 못한 광경이어서 새로운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런 점은 향후 우리나라의 인턴 및 학생들이 실습현장에서 어떤 교육을 받는 것이 좋을지에 대해 다시 고민해보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신속대응팀은 두 병원 모두 있었는데, VA Palo Alto는 우리 한국에서 흔히 하는 RRT(rapid response team) 보다는 CCRO (critical care outreach team)와 비슷한 형태로 운영되고 있었다. 중환자실에 근무하는 전임의 및 책임 간호사, 병동의 약사 등이 한 팀이 되어 활동하고 있었는데, VA Palo Alto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고, 중증 환자 역시 아주 많지는 않기 때문에 이런 형태의 시스템이 가능해 보였다. 여기는 EMR SCREENING하는 시스템은 따로 없고, 환자가 나빠지면 RRT를 부르는 방송이 나오면서 팀으로 연락이 오는데, 이 경우 중환자실에서 근무하던 전임의와 간호사가 함께 환자를 보러 병동으로 올라가 on site evaluation을 하고 병동 의료진과 충분한 discussion을 한 후, 환자를 중환자실로 데려오거나 step down unit으로 보내거나 좀 더 관찰하거나 하는 등의 결정을 한다. 약사는 어디선가 나타나 그 환자의 약에 관련된 제반 사항을 RRT닥터에게 브리핑 해주고 있었다.

Stanford hospital 같은 경우는 우리나라의 RRT와 비슷한 형태였다. designated RRT nurse가 따로 있었고, 우리처럼 EMR을 통해 고위험환자를 스크리닝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병원에서 직접 개발한 알고리즘을 사용하고 있었다. 다양한 변수들을 가지고, % risk of deterioration (RRT, Code, ICU transfer) 가 계산되어지고, 이 점수는 병동의료진을 포함한 모든 의료진이 볼 수 있도록 EMR에 들어가 있다. 또한 이 스코어를 누적해서 그 trend를 볼 수 있도록 그래프로도 표현된다 (deterioration index trending last 120 hours). 활동 방식은 우리와 거의 비슷했는데, 여기서 위험도가 높은 명단이 뜨면 RRT 간호팀에서 환자를 보고, 중재가 필요하면 RRT 를 전담하는 전공의/전임의에게 연락해서 환자를 보고, 환자가 중환자실에 입실해야 하거나 할 때는 RRT 담당하는 교수에게 연락하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이 RRT를 담당하는 교수는 응급의학과 전공이었는데 이 사람은 병동의 RRT를 전담하면서 전체적인 ICU triage를 관리하는 역할이었다.

 

 


 

(좌. Stanford hospital) (우. VA Palo Alto)

 


 

(ICU 격리병실)

 



5. 맺음말

연수생활에 대해서 도대체 어떤 내용을 써야 하는지 엄청나게 고민을 많이 했는데, 기억을 끄집어내 하나씩 풀어가다 보니 생각보다 내용이 너무 많아져서 이제는 어떻게 줄여야 할지가 고민이다. 내가 연수 오기 직전, 한 선배가 “연주야, 지금은 준비할 게 많아서 왜 이 고생을 하면서 연수를 가나 싶겠지만, 가서 1달만 지나보면 너 정말 좋아할거야.” 이렇게 말해준 적이 있다. 지금은 그 말이 무슨 의미였는지 정확히 알겠고, 100% 공감한다. 아직 장기연수를 다녀오지 않은 후배 교수들께 꼭 말해주고 싶다. “여러분, 오기 전에는 절대 모릅니다. 장기연수가 이렇게 좋은 것인 줄… 장기 연수 꼭 다녀오세요!”. 어느 새 벌써 반년이 지나 이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지만, 1년이 지나 다시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에 역시 감사하고, 이렇게 좋은 기회가 주어진 것에도 깊이 감사한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