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몬트리올 연수기

“Prehabilitation”은 “Rehabilitation”의 오타가 아닙니다.

  • 작성자

    조아름
  • Issue 38

    2024-03
  • 소속

    부산대학교병원 마취통증의학과

“Winter is coming.”


몇 해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끈 한 미드의 유명한 대사이다. 이 대사의 속뜻은 혹독한 겨울처럼 아주 힘든 상황이 곧 닥칠 거라는 불길한 대사로 사용되며 극의 긴장감을 높이는 데 쓰인다. 나는 유년기 때부터 지금까지 바다를 볼 수 있는 남쪽 도시에서 살았다. 따라서 나에게 겨울이란 춥지만 낭만이 있는 계절이다. 겨울에 한두 번 볼 수 있는 흩날리는 눈이 오는 날은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날이다. 영하로 내려가는 날은 가장 따뜻한 옷을 꺼내 입고 장갑과 모자를 쓰고 핫팩을 손에 꼭 쥔 채 입 밖으로 내뿜어지는 하얀 김을 보며 영하의 기온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날이다. 그런 내가 저 대사의 절박하고도 무거운 의미를 10여년 만에 드디어 깨닫게 되었다. 이 곳 몬트리올에서… 영하 20도로 내려가는 날은 숨을 코로 들이마시면 코와 눈 안의 액체가 빠지직 소리를 내며 얼어붙는 것 같은 느낌이 난다. Freezing rain이라는 것이 오면 세상이 얼음 나라가 된다. 눈이 아니라 정말 얼음으로 코팅 된다. 나뭇가지, 나뭇잎, 창문, 자동차, 전봇대, 길… 아마 한 시간 정도 밖에 서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도 얼음 인간이 될 것이다.




 

사진1,2 몬트리올 집에서 내려다보이는 가을과 겨울

 

사실 캐나다 몬트리올로 연수를 오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원래는 연 중 따뜻한 햇살을 맞으면서 러닝을 하고, 노을이 아름다운 하프문베이에서 골프도 치고, 요세미티의 하프돔을 사시사철 찾아갈 수 있는 샌프란시스코를 가고 싶었다. 그런데, 캐나다에서도 불어를 제 1 공용어로 사용하는 퀘백주의 몬트리올로 오게 된 이유는 prehabilitation clinic이 있기 때문이다. “prehabilitation”을 공부하러 왔다고 하면 대부분 “응? Rehabilitation?”이라고 대답한다. 아직은 prehabilitation(사전재활)이라는 개념은 의사들에게도 낯선 용어이다. 사전재활은 2000년 초반 북미에서 시작된 Enhanced recovery after surgery (ERAS, 수술 후 회복 향상 프로그램)라는 주술기 관리 프로그램에서 파생한 새로운 개념이다. 내가 연수를 온 맥길대학교의 몬트리올 종합 병원의 사전재활 클리닉조차도 겨우 두 돌을 갓 넘겼다. Carli 교수님은 ERAS를 탄생시키고 발전시킨 연구자들 중 한 명이고 오랫동안 ERAS를 임상에 적용하고 연구를 해 왔다. 퇴임 후에도 (현재 70세가 넘으셨다.) 사전재활이라는 개념을 발전시키고 널리 보급하려고 월급도 받지 않고 본인의 연구비와 모금받은 기금으로 클리닉을 개설하였고 현재도 일부 정부지원금을 받고 있지만 여전히 직원 중 일부는 연구비나 기금으로 고용 중이다.


따라서 클리닉은 크거나 화려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Carli교수님, 영양학과 교수님, 물리치료사, 임상전문영양사, 임상간호사, 운동요법사, 교수님들 밑으로 석사학생들, 코디네이터, 퇴임한 간호사들, 마취과 펠로우, 연구코디네이터로 운영이 되고 있다. 사전재활은 말 그대로 수술 전 환자들에게 재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ERAS가 주로 수술 중, 수술 후 프로그램에 집중을 하는 반면, 수술 전에는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연구에서 수술 전 환자들의 상태, 즉 영양, 신체 및 기능, 정신사회적 상태가 수술 후 회복에 유의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에 입각하여 사전재활이라는 프로그램이 고안되었다. 나는 개인적인 경험에서 이 개념이 무척 흥미롭게 느껴졌다. 코비드 판데믹 동안 나는 수십 km의 무박 산행을 즐겼고, 트레일 러닝을 하다가 결국에는 풀코스 마라톤까지 도전하게 되었다. 평소에 운동 중독자로 불리는 나이지만 15시간이상 걸리는 48 km의 지리산 화대종주나 42.19 km를 쉬지않고 달리는 풀코스 마라톤은 준비가 없다면 오히려 병만 생기고 실패로 끝이 날 것이란 건 명백했다. 그래서 이 도전들을 위해서 2-3개월 동안 꾸준히 식단도 하고 적절한 심폐 및 근력 운동을 하며 신체적 준비와 함께 준비를 잘 해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도전에 임했었다. 고위험환자들에게 수술은 마라톤과도 같다. 마라톤을 달리는 동안 계획을 가지고 물 및 영양소를 적절히 공급하고 페이스를 잘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마라톤이 끝난 후 체력이나 관절 및 근육을 회복하는 과정도 중요하다. 그러나 마라톤을 성공적으로 끝내려면 준비하는 과정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은 경험이 있는 나뿐만이 아니라 상식적으로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것을 제공하는 것이 사전재활 프로그램이다. 영양사가 영양 상담을 하며 식사 처방(주로 단백질)을 하여 근손실을 막거나 근육량을 늘려준다. 물리치료사나 운동요법사가 유산소 및 무산소 운동을 개개인의 신체상태에 맞추어 처방을 하고 고위험 환자의 경우는 병원에서 감시 하에, 아니면 집에서 개인적으로, 또는 줌으로 운동을 지시한다. 금연 및 정신사회적 상담도 필요한 경우 전문클리닉이나 은퇴한 간호사가 이를 담당한다. 나머지 내과적 질환들의 최적화는 바로 옆에 있는 술 전 외래에서 담당하며 사전재활 클리닉과 유기적으로 소통한다.


이러한 ERAS나 사전재활이 캐나다에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캐나다의 의료시스템때문인 것 같다. 캐나다는 미국과 국제전화번호도 같고 출입국도 무척이나 쉬워서 마치 한 국가인가하는 착각을 할 수 있지만, 의료시스템만은 극과 극이라고 할 수 있다. 캐나다는 100% 공공의료시스템이다. 현재 내가 연수 중인 맥길대학병원도 국가재정으로 운영된다. 따라서 국가에서는 의료비용을 가능한 아끼고 이것을 더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운영한다. 예를 들면, 환자들을 빨리 퇴원시켜서 병상을 확보해야 더 많은 사람들이 수술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재원일수가 우리나라와는 비교가 안되게 짧다. 고관절 및 슬관절 치환술은 당일 퇴원하고 흉강경을 이용하는 폐암수술은 보통 수술 후 1-2일 째 퇴원한다. 퇴원 후 상처 관리는 지역 간호사들이 방문하여 관리를 하고 퇴원 후 2-3일은 매일 담당의사가 전화해서 환자의 상태를 확인하고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는 경우 즉시 응급실로 오도록 권고한다. 따라서 ERAS 및 사전재활은 환자들을 가능한 외래 기반으로 보고 입원은 최소한으로 하려는 정부의 정책 기조와 그 결을 같이 한다.


이미 작년에 대장암에서의 사전재활의 긍정적인 효과를 여기 클리닉의 펠로우 선생님이 발표를 하였다. 나는 폐암환자들을 대상으로 유사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Carli교수님은 거의 매일 클리닉으로 출근을 하기 때문에 나는 클리닉에서 1-2주에 한 번 Carli 교수님과 연구간호사와 함께 연구 진행과 관련하여 회의를 한다. 그동안 들어왔던 여유 있는 연수생활과는 거리가 멀게도 매일 아침 출근하고 퇴근하면 두 아이들의 수영 및 영어와 불어 수업의 진행을 도와주느라 바쁘지만, 주말에는 아이들과 테니스도 치고 근교의 스키리조트에서 스키도 타며 어느 정도 여유를 즐기는 중이다. 휴가를 내는 것은 비교적 자유로워서 Carli교수님에게 미리 통보만 하면 언제든지 잘 갔다 오라고 환담을 해 주신다. 서양에서는 없을 것 같은 회식도 가끔 있고 할로윈, 크리스마스, 신년 파티나 기금 모금을 위한 이벤트들도 있다. 모두들 친절하고 가족 같은 분위기의 클리닉이다.




 

사진3. Carli 교수님 댁에서 사전재활클리닉 식구들과 함께 한 신년 파티

 

이 글을 읽으시는 중환자전문의 선생님들의 주요 관심사와는 조금은 다른 분야로 연수를 왔지만, 사전재활 클리닉에 의뢰되는 대부분의 환자들은 고위험 환자들이다. 노쇠하거나 많은 동반질환을 가지고 있는 암 환자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의 주술기동안의 긴 여정을 우리가 함께 하겠다는 것이 사전재활 클리닉을 홍보하는 포스터에 적힌 문구이다. 실제로 환자들이 사전재활 프로그램을 성실히 완료하고 수술을 무사히 받고, 한 달 뒤 사전재활 클리닉을 방문한다. 그때 환자들에게 수료증을 전달하고 기념 사진도 찍으면서 긴 여정의 성공적인 마무리를 함께 축하해 준다. 혹독한 겨울이긴 하지만 따뜻한 정이 있는 이 곳 사전재활 클리닉으로 연수를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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